원격근무에 대한 단상

원격근무에 대한 단상

몇 달 전 IBM이 원격근무 정책을 후퇴시킨다는 얘기가 크게 회자 되었다. 이커머스 Gilt.com CEO로 있다가 IBM에 CMO로 취임한 Michelle Peluso (미셸 펠루소)가 시범적으로 자기 관할인 마케팅 인력의 원격근무를 금지하고 회사로 출근하게 했다는 얘기다. 대표적인 공룡 실리콘 밸리, IT기업인 IBM이 어쩌면 자유의 상징인 원격근무를 해지한다는 것 자체가 언론에서 소비할 만한 얘깃거리긴 하다. 많은 사람이 반발했고, 일부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나도 IBM에서 일한다. 워낙 큰 회사고 하는 것도 많아서 IBM 마케팅 인력과는 거리가 아주 먼 컨설팅을 하고 있다 (Global Business Services). 컨설팅은 기본적으로 원격근무가 주되는 업계라 (월~목은 클라이언트 사이트로 가고, 금요일은 원격으로 일한다. 어떤 팀원은 시카고 오피스, 어떤 팀원은 뉴욕 오피스, 어떤 팀원은 LA오피스, 이렇게 각자 소속 오피스와 거주지가 다르기 때문에 클라이언트 사이트에 있지 않을 때는 원격으로 일한다) 앞으로도 계속 원격근무를 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원격근무에 대한 내 생각을 좀 적어볼까 한다. IBM에서 원격으로 근무해본 경험에 대해. 그런데 사실 지역적으로 원격근무가 덜 필요한 한국의 상황과는 좀 다를 수 있다.

미국에서 원격근무가 필요한 이유

우선 지역적인 면에서 볼 필요가 있다. 기업마다, 그리고 업계마다 편차가 있지만, 대부분의 미국 기업들에는 원격근무가 어색하지 않고 당연한 근무형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단, 미국은 땅덩어리가 넓다. 이게 사실 미국에서 원격근무가 필요한 이유 중 90%는 차지한다. 회사가 아무리 커서 지역마다 지사가 있더라도 땅덩어리가 넓은 미국에서는 시간상 그냥 원격근무하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다. LA에 있는 직원이 뉴욕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매일, 혹은 매주 왕복 8시간이 걸리는 (공항 대기시간, 이동시간도 생각하면…)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 것보다 아침에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전화 및 화면공유 등을 통해 일을 진행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정말 얼굴을 마주 보며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그때만 뉴욕으로 날아갔다 오면 되는 거다.

두 번째는 기업들의 조직적 인사전략 때문이다. 미국의 대기업들은 비용을 낮추기 위해 비핵심 HR이나 IT 인력은 off-shore (시간대가 같은 남미국가, 개발 인력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인도 등)으로 아웃소싱하거나 지사를 세우곤 한다. 그런데 아무리 뉴욕 본사에 있는 본인이 HR이나 IT 인력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가끔은 off-shore 인력들과 같이 일을 하거나 무엇인가를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당연하게 원격으로 일해야 한다. 이런 복잡한 걸 떠나서 국제기업의 경우 유럽과 APAC쪽 사람들과도 미팅을 진행해야 하는데 원격 인프라를 갖추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사실 IBM은 원격근무의 선구자였다. 이에 대한 연구자료를 낼 정도로. PDF 링크

기업이 원격근무를 해야 하는 이유 (혹은 원격 인프라를 갖춰야 하는 이유)

기업 입장에서 원격근무의 대표적인 장점은 두 가지로 나눠서 볼 수 있다. 한 가지는 인사전략으로서의 장점이다. 직원들이 원격으로 근무하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과 그리고 특정 일을 한 지역에 제한해서 진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예. 뉴욕에서 신제품 런칭을 준비하는데, 이 프로젝트에 투입될 인원을 굳이 뉴욕에서만 찾지 않아도 된다). 두 번째는 비용적인 측면이다. 직원들을 함께 근무시키기 위해 건물을 사거나 빌리거나 세워야 하고, 유지해야 한다. 또 이에 따른 인력도 낭비가 될 수 있다. 부동산 비용을 줄이는 것은 회사 차원에서는 큰 고정 비용을 대폭 줄이는 셈이고, 어느 회사든 그걸 마다하지는 않을 것이다.

직원이 원격근무를 해야 하는 이유 (혹은 하면 좋은 이유)

비즈니스 시간인 9시부터 5시까지 칸막이에 앉아서 일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옮겨 다니면서 작업하고, 밤늦게까지 작업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잠옷 차림으로 일해야 능률이 높아지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살짝 그런데, 내 삶과 작업방식을 좀 성찰해본 결과 나는 작업환경에 변화를 자주 줘야 하고, 9시~5시가 (8시간) 아닌 “10시 ~ 12시 + 1시~3시 + 7시 ~ 10시 + 12시 ~ 1시” 이렇게 띄엄띄엄 일하는 게 때로 능률이 높을 때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자주 변화를 주고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일하기에는 사무실 환경은 적합하지 않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의 눈치나 상사의 눈길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는 거다.

막말로, 상사 관점에서 부하 직원이 언제 어디서 일하든 정해준 시간에 제대로 일만 끝내서 가져오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원격근무의 장점에 대해서 좀 알아봤으니 원격근무를 하려면 필요한 것들에 대해 좀 알아보자.

미국에서 원격근무가 원할하게 잘 이루어지는 이유

IBM과 지금 내가 컨설팅하는 기업들 (Fortune 100)의 경우, 그리고 미국 대부분의 대기업은 원격근무가 원활하게 잘 이루어질 수 있게 조직문화와 인프라를 설비해두고 있다.

원격 인프라


이 업계에선 Cisco가 제일 잘하는 듯. Cisco WebEx는 화상통화, 채팅, 화면공유, 일반 통화 등 전반적인 업무 커뮤니케이션을 손쉽게 이어주는 플랫폼이다. IBM, 클라이언트 회사들뿐만 아니라 모든 회사가 Cisco WebEx를 갖고 있거나 사내 플랫폼을 갖고 있다 (IBM의 경우 둘 다 사용한다. WebEx랑 IBM 자체 애플리케이션인 ‘Smart Meetings’). AT&T와 Cisco WebEx등 전화로 연결해서 대화하고, 그리고 화면을 공유하면서 일하는 인프라는 원격업무에 있어 필요한 가장 중요한 항목이다. 두 번째는 전사적으로 통용되는 (그리고 외부 컨트랙터나 컨설턴트, 그리고 다른 회사들 시스템하고도 compatible 한) 이메일과 달력 매니지먼트 플랫폼이 필요하다. 세 번째는 카카오톡과 같은 사내용 instant messenger (IM)이 필요하다. 따로 이메일을 보낼 만한 정도의 내용이 아닌 빠르고 간결한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 필요한, 그런 플랫폼.

Version control, file sharing 도 중요한 부분. Box나 MS Sharepoint와 같은 파일 공유 플랫폼과 함께 각 문서를 편집, 수정할 때 버전을 매겨서 기록하는 일이 중요한 것 같다. 버전을 두고 문서를 만들면, 혹시라도 나중에 전 수정 버전이 필요할 때 업무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
정해진 회의시간을 넘지 않는 문화. 미팅을 스케줄 할 때 한 시간 한다고 했으면, 한 시간 안에 끝내야 하는 문화가 있어야 한다. 원격이라도 회의가 늘어지고 길어지면 정작 직원이 실제 업무를 진행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에,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만큼의 스트레스가 나온다 (ㅠㅠ).

아까도 잠깐 언급했지만, 언제든, 어디서 일하든 주어진 일만 확실히 해낸다면 원격업무를 한다고 해서 회사 차원에서는 아쉬운 게 하나도 없다. 직원이 집에서 일하더라도 확실히 deliver 할 수 있다는 신뢰가 성립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원격근무의 아쉬운 점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때로는 머리를 맞대고 고민할 필요가 있는 거다. 일을 하다 보면 같이 일하는 팀원에게 설명할 때 말로만 해서는 안 되는 부분들이 생기기 마련이고, 원격근무를 하다 보면 그런 게 정말 짜증스럽다. 영어를 제2 국어로 구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미국 전역의 다양한 발음이 큰 이슈다. 잘 안 들린다. 이런 부분은 만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일을 진행하면 좀 더, 아니 훨씬 수월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다. 원격근무에는 감정을 전달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원격근무를 성공적으로 하는 데 필요한 것들

회의를 하기로 하고 정해진 시간에 서로 WebEx로 dial-in하기로 했으면 해야 한다…! 왜 때문에 이런 기본적인 걸 안 지키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다. 아까도 말했지만, 원격근무가 가능해지려면 서로의 신뢰가 있어야 하는데, 시간 엄수도 못하는 직원들하고 일하면…답이 없다.

전화 통화가 커뮤니케이션의 100%라면 듣는 대로 내용을 머릿속에 시각화할 수 있는 능력이 좀 많이 필요한 것 같다. 이건 많은 사람이 공감할 대목인데, 상사가 이것저것 전화로 일을 지시하다 보면 도대체 상사가 뭘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을 때가 많다. 듣기 연습을 해야 하나…

원격근무를 믿지 않는다면 그 대신 투자해야 할 것들

구글, 페이스북과 같은 회사들은 원격근무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갖고 있다. 2013년에는 야후의 머리사 마이어도 야후는 “collaborative business”라는 명분에 따라 원격근무를 금지하기도 했다. 맞다. 같이 동고동락하면서 일을 진행해야 효율적일 때가 있기도 하다. 그런데, 그러려면 기업은 그저 원격근무를 금지하는 것보다 자유롭게 허용하며 사무실 환경을 점차 ‘일하고 싶은’ 환경으로 바꿔 나가야 할 것이다. 단순히 시각적인 요소를 넘어서, 상사의 압박이나 기업 문화 등에 대한 깊은 고민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에 맞는 execution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원격과 사무실 환경의 적절한 균형이 중요.

양극화는 좋지 않다. 직원이 원하거나 필요로 할 때는 원격근무하는 것을 격려해주고 자율적으로 시행하게 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원격으로 근무하는 것보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게 더 즐겁게 만들어줄 필요도 있는 거다. 이러한 자유롭지만, 문화를 조성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