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도리(Midori) 브랜드 이야기

공책의 본질은 기록이다. 공책은 생각을 적고 대화를 기록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튼튼한 기록하는 경험을 좋게 만들어 주는 공책이 곧 좋은 공책이다. 그리고 기록하는 경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종이이다. 손을 맞대고 필기구로 글씨를 써 내려갈 때 느낄 수 있는 필기감은 우리가 컴퓨터를 두고도 여전히 공책을 쓰는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미도리(Midori) 브랜드 이야기

나는 글쓰기를 좋아한다. 이제 대부분의 글은 컴퓨터로 쓰지만, 아직도 복잡한 생각이 들 때나 빠르게 아이디어를 구체화할 때는 종이로 만든 공책에 펜으로 메모를 하곤 한다. 무언가 적을 일이 생각날 때면 컴퓨터나 아이폰을 여는 것보다 더 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생각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것에는 튼튼하고 오랜 시간 사용해도 만듦새가 흐트러지지 않는 공책과 펜만 한 도구가 없다.

종이는 매력적인 필기수단이다. 효율이 높은 키보드도 좋지만, 나는 손으로 직접 글씨를 쓸 때 더 깊게 생각할 수 있다.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문장이 모일 때 내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는 기분이다.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고 있을 때보다, 연필을 움켜쥐고 흰 종이를 보고 있을 때 내 생각은 더 신선해진다.

그래서 여러 디지털 도구들을 애용하지만, 여전히 어딜 가든 나는 공책과 펜을 챙긴다. 언제 어디서든 떠오르는 생각을 손에 움켜쥐고 기록하기 위해서다.

여태 꽤 많은 종류의 공책을 사용해보았다. 물건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고 좋은 물건을 찾는 일을 내 취미로 삼았기에 발품 팔아 잘 알려지지 않은 제품도 찾아보고 평판이 좋은 제품도 사용해봤다. 다 생각나지는 않지만 몰스킨(Moleskine), 로이텀(Leuchtturm), 로디아(Rhodia), 로루반(Rollbahn), 배론 피그(Baron Fig) 등 다양한 브랜드의 제품을 두루 사용해봤다.

작년부터 사용하고 있는 미도리(Midori)는 1960년대 창립해 품질 높은 종이를 만들어 왔던 일본의 종이 제조사가 2008년부터 자사의 제조기술을 기반으로 제작하고 있는 문구 브랜드이다.

만년필의 필기감을 해치지 않고 잉크가 쉽게 번지지 않는 종이를 찾다가 미도리에 대해 알게 되었다.

좋은 공책의 조건

  1. 품질 좋은 종이
  2. 좋은 만듦새
  3. 굴곡 없이 펼쳐지는 바인딩
  4. 실용적인 구성

무엇보다, 종이

공책의 본질은 기록이다. 공책은 생각을 적고 대화를 기록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튼튼한 기록하는 경험을 좋게 만들어 주는 공책이 곧 좋은 공책이다. 그리고 기록하는 경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종이이다. 손을 맞대고 필기구로 글씨를 써 내려갈 때 느낄 수 있는 필기감은 우리가 컴퓨터를 두고도 여전히 공책을 쓰는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오랜 시간 경험과 기술을 쌓아온 미도리의 종이는 모두 잎이 넓은 활엽수 나무에서 추출한 펄프를 물에 풀어 제작되는데, 이때 쓰이는 활엽수는 잎이 좁은 침엽수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질감을 제공한다고 한다.

펄프를 강에서 수렴하고 여과를 거친 물에 풀고, 수중에서 짓이겨 죽처럼 만들면 노르스름한 크림색을 띠기 시작하고, 비로소 종이를 만들 준비가 끝난다.

일반적으로는 흰색 (#FFFFFF)을 갖기 위해 추가적인 공정을 거치지만, 미도리에서는 종이 본연의 색을 유지하기 위해 짓이겨진 크림색 펄프를 그대로 둔다. 이렇게 짓이겨진 펄프는 미도리의 공장에서 사람과 기계의 손을 거쳐 완성된다.

완성된 종이는 마지막으로 검품을 거친다. 검품사가 종이를 보고, 만져보고, 필기해보고, 비교해보며 미도리의 종이 품질을 관리한다. 종이의 두께, 무게, 적당한 부드러움, 색깔, 그리고 잉크의 번짐, 건조 속도 등을 확인한다. 이렇게 촉감, 모양, 질감, 필기감 등의 다양한 검사를 거치면, 그제야 제본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미도리의 종이는 알맞은 두께와 규격을 가졌다. 일정한 모양과 두께로 잘린 미도리의 예쁜 크림색 종이는 글씨를 쓰기 좋은 질감을 제공한다. 종이라고 다 같은 종이가 아니다. 품질이 떨어지는 종이는 잉크를 머금은 만년필의 닙이 닿자마자 꽃이 피듯 번진다.

미도리의 종이 위에서는 아무리 두꺼운 닙의 만년필이라도 잉크가 쉽게 번지지 않는다. 또한 너무 얇지 않아서 이전 페이지의 내용이 잘 비치지 않는다. 좋은 재료로, 올바른 공정을 거쳐 만든 종이는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종이의 두께도 적당하다. 너무 두껍지 않아 연필이나 기계식 연필을 너무 세게 쥐지 않아도 된다.

좋은 만듦새

미도리의 웹사이트에 이런 표현이 있다.

"궁극의 심플리시티를 실현한 것은 결국 표준으로 되고, 반대로 절대적인 개성이 생깁니다."

미도리의 공책은 단순하다. 색깔도 한가지 색상을 채택했다. 다른 브랜드에서는 다채로운 색깔 옵션과 온갖 장식이 들어가는 스페셜 에디션도 많이 출시하는데, 미도리는 여전히 한가지 디자인, 한가지 색상을 고집한다. 위에서도 얘기했지만, 미도리의 색은 짓이겨진 펄프가 띄는 노르스름한 크림색 그대로를 담고 있다.

몰스킨, 로이텀 등 다른 유명 브랜드들은 다양한 사람들의 취향을 고려해 무수하게 많은 색깔과 디자인을 제안한다. 미도리에서는 크림색 한가지 색상만을 판매한다. 그래서 더욱 미묘(subtle)하지만 미도리가 언급한 '절대적인 개성'이 돋보이는 면이 있다.

미도리 만의 크림색은 특별하다. 햇빛을 받을 때면 쨍한 느낌이 따스하다. 미도리 공책들은 겉을 왁스 종이로 두르고 있는데, 이것도 다른 브랜드에서는 찾기 힘든 미도리 고유의 느낌을 준다. 시간이 지날수록 색이 약간 바래고, 왁스 종이가 구겨지면서 사용자 자신만의 흔적이 남는다.

미도리만의 순수한 단순함의 추구는 소재 선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미도리의 공책은 여느 프리미엄 브랜드와는 달리 인조 가죽으로 만든 겉표지가 없다. 대신 빳빳한 종이로 만든 표지가 있고, 그리고 그 위에 얇은 왁스 종이로 표지를 감싼다.

이렇게 한 이유 역시 단순하다. 필기감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죽 표지를 추가하면 공책의 펼침과 겉도는 것이 필기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나는 미도리에 큰 점수를 주고 싶다. '무엇을 더할까'보다 '무엇을 뺄까'에 집중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또 튼튼함이 좋은 만듦새의 유일한 기준이라면, 미도리는 좋은 공책이 아니게 된다. 하지만 튼튼함이 좋은 만듦새의 유일한 기준이었다면 애플의 아이폰도, 떨어트리면 펜촉이 휘는 몽블랑의 만년필도 조건에 들지 않을 것이다.

미도리는 그 대신 좋은 필기감을 안겨주는 종이라는 소재만의 매력을 좀 더 확장하고자 했고, 그래서 인조 가죽을 포함한 여러 가지 소재를 사용하기보다 종이를 최대한 많이 활용하고자 한 것이다. 덕분에 미도리 공책에서는 순수한 종이 그 자체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보편적인 장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래서 미도리 공책을 좀 더 조심스럽게 다루게 되었다. 예전에 몰스킨이나 로이텀 공책을 썼을 땐 이리저리 던지고 다니기도 하고 스크래치가 나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미도리 공책을 그렇게 쓰면 얼마 안 있어 표지가 접히고, 심지어는 찢어질 수도 있기에 조심스럽게 다룬다.

굴곡없이 펼쳐지는 바인딩

몰스킨이나 로이텀에서 제일 불편했던 점이 공책을 펼쳤을 때 완전하게 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평평하지 않은 종이에 글씨를 쓰면 열에 아홉은 예쁜 글씨를 쓰기가 어렵다.

미도리의 대표상품인 MD 노트는 180도 펼쳐지게 되어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설계는 제본 방식에서 찾을 수 있는데, MD 노트는 16페이지로 접힌 종이 다발을 실로 꿰매 엮는 '반양장제본'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바인딩이 그대로 보여 함부로 다루면 자칫 찢어질 수도 있는 내구성의 아쉬움이 약간 있지만, 기본적으로 물건을 소중하게 다루는 사람이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몰스킨처럼 바인딩 커버가 있는 방식으로 종이를 묶으면 공책을 펼쳤을 때 종이가 완벽하게 펼쳐지지 않고 경사가 생긴다. 아주 큰 불편함은 아니지만, 작은 것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나에게는 미도리의 제본 방식은 큰 개선점이었다.

미도리의 특별한 제본 방식은 미도리 공책의 전반적인 만듦새에도 기여한다. 원래 일반 공책의 제본은 겉표지에 숨겨져 볼 수 없지만, 반양장제본을 거친 미도리의 MD 노트에서는 접착제를 고르고 일정하게 바른 다음 붙이는 '한랭사'라고 하는 망사를 겉면에서 볼 수 있다. 역시 원재료 날것('raw 함')의 매력을 담고 있다.

실용적인 구성

매일 반복해서 사용해야 하는 공책이 멋스럽기만 하고 실용적이지 못하면 손에 잘 잡히지 않게 된다. 몰스킨은 그래서 결국 내 손을 떠났다.

실용적인 공책은 실제로 내가 매일 쓰기에 방해가 될 요소가 없는 공책이다. 이를테면 무게, 크기, 두께, 내구성, 생김새, 선 (무지, 유선, 방안) 등이 방해가 될만한 것들이다.

너무 크거나 무겁거나 두꺼우면 들고 다니기 번거롭고, 종이를 묶어서 다니는 것과 다름없을 만큼 내구성이 약하면 금방 구겨지고 찢어지기 쉬울 것이다. 글씨를 쓸 때 간격이 너무 비좁으면 필기에 흥미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미도리는 적당히 알맞은 규격에 오래 사용해도 싫증이 나지 않을 편안하고 따뜻한 색깔을 갖고 있다.

내가 경험한 미도리는 이렇게 방해가 될만한 요소를 최소화하는데 노력하는 제품이다. "무엇을 더 잘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못하고 있는 것을 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돋보인다.

근본(根本)

여러 달 미도리의 제품을 사용해본 바로 이들의 최종 가치는 '근본(根本)'이다.

미도리는 공책의 근본이 되는 원재료에 최소한으로 추가하고, 날것 그대로를 최대한으로 살려 단순하면서도 개성 강한 공책을 만들었다.

무엇을 추가하거나 더 잘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보다 무엇을 더 제거하고 잘하지 못하는 것을 뺄 것인가를 고민한 흔적이 돋보여 마음에 들었다. 펜과 종이는 사라질 것이라는 얘기를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던 것 같다. 그래서 종이 업자들도 무던히 고민해 디지털 노트도 만들어 출시해보고 몰스킨은 디지털 사업으로도 확장해 노트 앱도 만든다.

전략적 선택의 결과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지만, 나는 미도리가 집중하고 있는 '종이'라는 원재료의 순수함이 마음에 든다. 더하는 것보다 더 안 하는 것, 그것이 미도리가 갖는 단순함이면서도 동시에 절대적인 개성이다.


Midori 웹사이트

커버 사진: Midori
자료 인용 및 참고: Midori